子曰:
공자님 가라사대

道千乘之國
보통 道를 '다스린다'라고 새기는 데, 다스리는 것과 이끄는 것(directing)은
어감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道라함은 인도하는 것이라는 새김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큰 나라(千乘之國, 전차 천대를 낼 수 있는 나라)를 이끌 때에는

敬事而信
사안은 조심스럽게 다루되 믿음이 가도록 하고,

節用而愛人
쓰임새는 (사람과 물자를 모두) 아끼되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使民以時
국민을 부릴 때에는 때에 맞도록 해야 한다.

프라세나짓왕이 부처님에게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이 답하기를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라 하였다.
이는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하한 목표를 향하는
리더로서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리더(왕)이 된다는 것은 그 구성원이 모두 잘 되도록 도모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사사로운 願(원)을 구현하기 위해 구성원을 부리는 것이 그 목적이 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일이라는 것은 정성을 다 하여도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이므로,
정성을 다 하는 것에 뜻을 두면 마음이 괴로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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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행복

日記 2016. 1. 6. 12:56

가끔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ABE 전집 중에 있었다. 그 제목이 인상적이었는지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다. '우리가 왜 사는지 잘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에 읽어봤었는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이게 답이로군'이라 할만한 생각을 얻진 못했던건 기억난다. 아마도 어려서였겠지. 비슷한 경우로 Daniel Gilbert의 'Stumbling on Happiness'가 그랬다. 그 뒤로도 가끔 왜 사는지 궁금해 했었는데, 청소년기 중반에 나름 사람은 행복하려고 사는거라고 결론지었다. 

삶과 행복. 최근 10년 안쪽으로는 삶은 happening이라고 깨닫고도 '행복하려고 산다'는 문구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삶은 행복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그 삶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겪에 되는데 그 와중에 이성과 감정이 바람에 이는 먼지처럼 일어난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흔히 생각한다. 감정은 사람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즉각적으로 대응해야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기작이다. 그래서 감정은 빨리 일어난다. 공포심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생활 환경에서 공포심의 역할은 초기 인류에게 필요했던 만큼 중요하지 않다 (Fearless in Invisibilia 참고). 그러나 공포심은 쉽게 일어나고 또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데 잘 쓰인다. 종교에서 언급하는 지옥이 대략 그런 예겠지.

쉽게 공포를 느껴야 혹시 만날 지 모르는 있는 맹수를 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먹을 것이 늘 귀하기 때문에 탐욕스러워야 삶을 유지할 수 있고, 어쩌다 물이나 먹을 것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을 때 아드레날린을 뿜어내기 위해서는 흥분(혹은 분노)하여야 쟁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먹거리를 기를 수 있게 된 후로는 이러한 기작보다는 앞일을 계획하는 것이 중요해서 전두엽에 내일(혹은 미래)을 모의(simulation)할수 있는 부위가 발달하였을게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사람의 생존에는 감정보다는 이성의 기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삶에서 위에서 언급한 본능적 감정은 우리를 그닥 기분 좋은 상태에 머물게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체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공포를 느낄 일이 없고 (얼마나 공포심의 임계치가 낮고 느낌의 강도가 센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상태는 매우 드물게다), 탐욕이 채워지고, 또 경쟁할 일이 없다면 행복하겠지. 그래서 그런 상황에 이르려고 출세하려 하고, 돈벌려 하고,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려하고 그러겠지. 하지만 모든 생명에게는 사계절이 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시절은 봄철에 한 주, 가을철에 한 주처럼 짧다. 정신없이 살다보면 그나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보내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행복할 수는 없는걸까?

고대의 서양철학부터 현대의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궁극적(혹은 지속적) 행복은 중요한 화두이다. 사람의 삶이란 그러한 행복을 얻기(또는 구하기)위한 것인가? 그러한 행복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가? 그 쪽에서 그 답을 찾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분들은 그 해답을 찾아 남겨놓았다.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게 마음을 쓰는 방법이 이미 알려져있다. 그렇지만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 하지는 않는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많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 중 하나일 뿐이라 한다. 그 깨달음을 논어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논어를 읽으며 그 깨달음을 다시 확인하고 계속 그 마음 씀을 익히니 즐거울 따름이다. 그게 바로 논어의 첫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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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논어 읽기 4

日記 2015. 12. 30. 06:33

曾子曰
(공자의 제자 중) 증자가 전하길

吾日三省吾身
나는 (매)일 나 자신에 대하여 3가지를 돌아본다.

為人謀而不忠乎
다른 사람과 이야기(의논)할 때 성심껏(忠)하지 않았는지,
매사에 온 정성을 다하시라.

與朋友交而不信乎
벗을 대할 때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는지,
하지만, (벗의) 믿음은 무엇일까? 신의(信義)를 지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친구가 부탁하면 다 들어줘야하나? 믿음이라 함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옳고 그름, 취향을 떠나 모든 것에 의미가 있으니 나 자신도 또한 벗도
생명으로서의 귀함과 의미가 있다. 이러한 믿음을 잊어버리고 상대방을 허투루 대하지는
아니하였는가를 묻는 것이리라.
결국 첫번째 구절과 같은 이야기인데, 모르는 사람이 아닌 가까운 사람(朋)이기에
忠이 아닌 信을 언급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모르는 사람끼리는 아직 믿음을 쌓은 바가
있을 수 없으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깨지거나 오해하기 쉬운 믿음이
있으니, 가까운 사이가 틀어졌을 때 미움이 더 심해지지 않던가.

傳不習乎
(스승, 즉 공자로부터) 배운(傳해들은) 바를 익히지 않지는 않았는지.
좋은 가르침을 받았으면 잘 익혀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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