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弟子
모름지기 사람은

入則孝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出則弟
(집 밖에) 나서서는 (나대지 말고) 공손하며

謹而信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도록 하고

汎愛眾
(모든) 사람을 두루 사랑하여

而親仁。
仁과 가깝도록 해야한다. 

仁이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존중하는 자세이다.
나와 남이, 또 나와 자연이 별개가 아닌 촘촘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자신을, 또 남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仁은 깨달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실천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仁에 가깝게 하루 또 하루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그 것이 곧 내가 행복하고 또 내 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行有餘力,則以學文。
그러고도 힘이 남으면 배움(지식을 익힘)에 힘써라.

지식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마음이 행복해지면 익벼볼만한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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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
공자님 가라사대

道千乘之國
보통 道를 '다스린다'라고 새기는 데, 다스리는 것과 이끄는 것(directing)은
어감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道라함은 인도하는 것이라는 새김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큰 나라(千乘之國, 전차 천대를 낼 수 있는 나라)를 이끌 때에는

敬事而信
사안은 조심스럽게 다루되 믿음이 가도록 하고,

節用而愛人
쓰임새는 (사람과 물자를 모두) 아끼되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使民以時
국민을 부릴 때에는 때에 맞도록 해야 한다.

프라세나짓왕이 부처님에게 '훌륭한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이 답하기를 '백성 사랑하기를 외아들 사랑하듯이 하십시오'라 하였다.
이는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하한 목표를 향하는
리더로서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리더(왕)이 된다는 것은 그 구성원이 모두 잘 되도록 도모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사사로운 願(원)을 구현하기 위해 구성원을 부리는 것이 그 목적이 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일이라는 것은 정성을 다 하여도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것이므로,
정성을 다 하는 것에 뜻을 두면 마음이 괴로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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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행복

日記 2016. 1. 6. 12:56

가끔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이 ABE 전집 중에 있었다. 그 제목이 인상적이었는지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다. '우리가 왜 사는지 잘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에 읽어봤었는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이게 답이로군'이라 할만한 생각을 얻진 못했던건 기억난다. 아마도 어려서였겠지. 비슷한 경우로 Daniel Gilbert의 'Stumbling on Happiness'가 그랬다. 그 뒤로도 가끔 왜 사는지 궁금해 했었는데, 청소년기 중반에 나름 사람은 행복하려고 사는거라고 결론지었다. 

삶과 행복. 최근 10년 안쪽으로는 삶은 happening이라고 깨닫고도 '행복하려고 산다'는 문구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삶은 행복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그 삶에는 이러저러한 일을 겪에 되는데 그 와중에 이성과 감정이 바람에 이는 먼지처럼 일어난다.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흔히 생각한다. 감정은 사람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즉각적으로 대응해야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기작이다. 그래서 감정은 빨리 일어난다. 공포심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생활 환경에서 공포심의 역할은 초기 인류에게 필요했던 만큼 중요하지 않다 (Fearless in Invisibilia 참고). 그러나 공포심은 쉽게 일어나고 또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데 잘 쓰인다. 종교에서 언급하는 지옥이 대략 그런 예겠지.

쉽게 공포를 느껴야 혹시 만날 지 모르는 있는 맹수를 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먹을 것이 늘 귀하기 때문에 탐욕스러워야 삶을 유지할 수 있고, 어쩌다 물이나 먹을 것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을 때 아드레날린을 뿜어내기 위해서는 흥분(혹은 분노)하여야 쟁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먹거리를 기를 수 있게 된 후로는 이러한 기작보다는 앞일을 계획하는 것이 중요해서 전두엽에 내일(혹은 미래)을 모의(simulation)할수 있는 부위가 발달하였을게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사람의 생존에는 감정보다는 이성의 기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삶에서 위에서 언급한 본능적 감정은 우리를 그닥 기분 좋은 상태에 머물게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체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공포를 느낄 일이 없고 (얼마나 공포심의 임계치가 낮고 느낌의 강도가 센지를 생각해보면 이런 상태는 매우 드물게다), 탐욕이 채워지고, 또 경쟁할 일이 없다면 행복하겠지. 그래서 그런 상황에 이르려고 출세하려 하고, 돈벌려 하고,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려하고 그러겠지. 하지만 모든 생명에게는 사계절이 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시절은 봄철에 한 주, 가을철에 한 주처럼 짧다. 정신없이 살다보면 그나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보내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행복할 수는 없는걸까?

고대의 서양철학부터 현대의 심리학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궁극적(혹은 지속적) 행복은 중요한 화두이다. 사람의 삶이란 그러한 행복을 얻기(또는 구하기)위한 것인가? 그러한 행복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가? 그 쪽에서 그 답을 찾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분들은 그 해답을 찾아 남겨놓았다.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게 마음을 쓰는 방법이 이미 알려져있다. 그렇지만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 하지는 않는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많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 중 하나일 뿐이라 한다. 그 깨달음을 논어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논어를 읽으며 그 깨달음을 다시 확인하고 계속 그 마음 씀을 익히니 즐거울 따름이다. 그게 바로 논어의 첫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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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논어 읽기 4

日記 2015. 12. 30. 06:33

曾子曰
(공자의 제자 중) 증자가 전하길

吾日三省吾身
나는 (매)일 나 자신에 대하여 3가지를 돌아본다.

為人謀而不忠乎
다른 사람과 이야기(의논)할 때 성심껏(忠)하지 않았는지,
매사에 온 정성을 다하시라.

與朋友交而不信乎
벗을 대할 때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는지,
하지만, (벗의) 믿음은 무엇일까? 신의(信義)를 지킨다는 것은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일까?
친구가 부탁하면 다 들어줘야하나? 믿음이라 함은 나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옳고 그름, 취향을 떠나 모든 것에 의미가 있으니 나 자신도 또한 벗도
생명으로서의 귀함과 의미가 있다. 이러한 믿음을 잊어버리고 상대방을 허투루 대하지는
아니하였는가를 묻는 것이리라.
결국 첫번째 구절과 같은 이야기인데, 모르는 사람이 아닌 가까운 사람(朋)이기에
忠이 아닌 信을 언급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모르는 사람끼리는 아직 믿음을 쌓은 바가
있을 수 없으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깨지거나 오해하기 쉬운 믿음이
있으니, 가까운 사이가 틀어졌을 때 미움이 더 심해지지 않던가.

傳不習乎
(스승, 즉 공자로부터) 배운(傳해들은) 바를 익히지 않지는 않았는지.
좋은 가르침을 받았으면 잘 익혀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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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논어 읽기 3

日記 2015. 12. 23. 01:05

子曰
공자 말하길

巧言令色 鮮矣仁
앞에서 이해한 인(仁)의 의밀르 따르면 이 말은 우리말로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낯을 꾸미는 것이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仁)인 경우는 드물다"고
읽을 수 있다. 꼭 쓴 음식이 몸에 좋은 것은 아니라해도 달디 단 음식이 몸에 좋은 경우는 드물다.
당장 보이는 이익을 따르는 것이 결국은 자신에게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문 것처럼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는 법륜 스님이 법문 중에 늘 말하는 것 처럼 쥐가 쥐약을 먹는 꼴이고,
이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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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논어 읽기 2

日記 2015. 12. 21. 23:57

有子曰
공자의 제자 有子가 말하기를

其為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
효(孝)는 부모를 공경함을 말하고 제(弟)는 동생이나 공경한다는 뜻이다.
이 문구가 전체적으로 윗사람을 대하는 사람됨에 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논어와 같은 글이 국왕/사대부의 권위주의에 바탕한 체제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데에 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제(弟)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공손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충분한지 모르겠다.

특히, 우리나라는  말에 어른에게 이르는 법과 친구간에 말하는 법, 아랫사람을 하대하는 법이 정해져 있어
나이 몇 살 어리다고 마구 대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 중에도 초면인 사람에게, 또는 제자에게도
하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를 비추어 보면 아래처럼 이해할 수도 있다.

"그 사람됨이 아랫사람에게도 공손하면서 윗사람에게는 함부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不好犯上,而好作亂者,未之有也
다음 문구는 댓구이면서도 이어지는 내용으로 읽을 수 있다.
"윗사람에게 함부로 하려 하지 않는데 행동거지가 난잡한 사람도 없다. "

君子務本,本立而道生
위의 두 구절이 사람에 대한 예시라면 다음 두 구절은 그러한 사람됨이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한다.
"군자(깨달음에 이르고 항상 정진하는 사람)는 근본을 (바로 세우는 데) 힘쓴다.
(왜냐하면) 바로 세운 근본에서 (바른) 길이 나기 때문이다."

논어에서 도(道)를 한마디로 이야기 하기는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군자(혹은 부처)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바', 즉 깨달음의 실천적인 면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孝弟也者,其為仁之本與
결론으로 "아랫사람에게(도) 공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仁)을 이루는 근본이다".
위에서 나온 도(道)와 같이 인(仁)도 우리말로 간단히 정의하기가 까다로운데,
한자의 경우 그 글자가 형성된 과정을 보면 그 원래 의미를 조금이나마 유추해 볼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인(仁)의 뜻(어질다)에 비추어 글자를 해석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를 두고 보면 仁은 사람(人)이 둘(二)일 때를 상징한다. 흔히 두 사람이 같이 잘 지내기 위한
조건으로 仁의 의미를 생각하여 친하다 혹은 어질다고 해석하는가 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이 같이 잘 지내려면 서로 비슷한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부분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훨씬 더 중요하다. 부부관계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두 사람이 잘 지내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미덕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가로막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이다. 나의 취향이
나의 견해가, 나의 행동이 모두 나의 경험과 습관에 의해 나도 모르게 정해졌을 뿐 옳은 것이 아님을
미처 모르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님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아랫 사람 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긴다.
설사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랫사람 혹은 미물에게까지도 공손하게 대한다면
어느 사람과 함께 하더라고 잘 지낼 수 있기에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仁)를 이루는 근본이라 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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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논어 읽기 1

日記 2015. 12. 19. 00:03

군자(君子)는 부처다. 깨닫고 늘 수행(修行)에 정진하는 사람이다.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아닌, 누구나 될 수 있는 인격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해하면 논어의 첫 구절을 이렇게 읽을 수 있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
보통 우리가 알기로 이 구절은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로 읽는다. 공부를 좋아하는 소위
학자가 아니라면 누가 예습복습을 반복하며 기뻐할까? 논어를 편집한 사람들이 가방 끈 길이를 그렇게
중요히 여겨 제일 첫 구절로 놓았을 것 같지는 않다.

배운 것은 글자가 아니고 아마도 도(道)일 것이다. 배웠을 때 바로 깨닫는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이성적으로는 깨달은 바가 있어도 그의 습관(濕觀)에 따라 잠재의식이 갖은 감정을 일으키고 말하고 또
행동한다. 따라서 배워 깨달은 것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늘 돌아보아야 한다.
이렇게 깨달은 바를 수행 정진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늘 기쁘다. 이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과 같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라"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마음이 맞는 친구란 귀하기 이를 데 없다.
인생의 바닥을 지나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지위도 명예도 재산도 건강도 없을 때에도 소식과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냄이 없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흔히 온(慍)을 성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원망하다라는 뜻도 있고, 글자를 뜯어보면 마음에 흔들림,
특히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러한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군자라면 그게 곧 부처가 아닐까?
더 나아가, 보왕삼매론의 마지막 구절처럼 억울함을 당해서도 마음에 동요가 없다면 이것이
군자이고 부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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